▣ 내가 볼 수 있는 그는...  

 

오직 전체 채팅창으로 올라오는 파란 글씨뿐이었다.  

  

그는 전체 채팅으로 그날 크리전쟁에 참여한 모두를 독려했고 종족 전체를 보듬고 있었으며 내가 벨라토 종족의 한 구성원임을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었고 아직은 낮은 레벨의 내가 좀 더 빨리 성장해 저런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 싸우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전쟁의 고단함도 잊은 채 적국의 게릴라가 설친다며 포탈부터 광산 안까지 저레벨들이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에스코트를 하자고 자신들의 의무 아닌 의무를 다하려 노력했고 채팅창으로 올라오는 그의 말에 고레벨 유저들도 흔쾌히 따르곤 했다.  

 

 

그것이 족장으로써의 카리스마일까...  

 

 

 

 

▣ 내가 그를 처음 보게 된 것은...   

포탈부터 광산 안까지 가는 '버스'에서 였다. 적국의 게릴라에 대부분의 종족원들이 광산에 도착도 못하고 죽어버리자 족장과 고레벨들이 모여 우리 종족원들을 에스코트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그는 나와 같은 작은 체구의 벨라토 마법사 계열이었고 기갑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부를 쌓지도 못한 사람이었으며 전사계열의 중급 스킬 단 한방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릴 만큼 그다지 좋은 캐릭터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항상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어떤 전쟁이던 최전방에 서있었으며 아무리 암울한 상황이더라도 전체채팅으로 우리를 응원했고 사기를 북돋아주고 있었다.  

 

 

그의 작은 등은 기갑의 육중함을 이미 넘어서고 있었고 그를 따르는 나와 같은 종족원들도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보호아래 우린 안전하게 광산까지 다다를 수 있었고 치열한 전투로 얻어낸 광산의 소유권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나도 저사람 옆에서 함께 싸우고 싶다...'  

 

 

 

▣ 그때까지는 단순한 동경일 뿐이었다.  

 

광렙을 하기 시작한 이유도 지루한 사냥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단 한 번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그저 그와 대화를 나누며 내가 받은 도움들을 다른 종족원들에게 나 또한 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그의 전체채팅을 보며 끊임없이 그를 동경했고 약 6일에 걸친 광렙업과 광물채집으로 전직과 함께 원거리 기갑병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내 재미도 재미지만 그 사람 옆에 당당히 설 수 있고 싶었고 나에 대한 호감인지 기갑에 대한 믿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토록 원했던 '그 사람과 함께 싸우고 싶다'는 내 바램을 드디어 이룰 수 있었다.  


 

그렇게 그와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와 둘도 없는 친구로 발전했고 좋아하는 게임 속에서의 족장의 역할과 현실에서의 위치에서 괴로움을 느끼는 그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으며 그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그의 고충역시 나눌 수 있었다.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쏟아지는 귓말들...  

자신의 재미를 위한 사냥과 게임 플레이는 이미 포기했다며 씁쓸하게 웃는 얼굴...  

현실의 제약 때문에 접속을 하지 못해 광산의 소유권을 빼앗겼을 때 쏟아지는 욕설들...  

 

 

 

▣ 이미 그에게는 게임의 즐거움이 무거운 책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도 결코 그런 점을 남에게 내색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함께 전장을 누비고 치열한 전투를 치룰 때마다 일종의 존경심과 연민이 동시에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그는 나에게 뜻밖의 제의를 해왔다.  

 

 

족장의 자리를 넘겨받아 자신을 도와주지 않겠느냐는 그의 제안에, RF온라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채굴기와 배터리 한 개만을 든 상태로 그의 등을 쫓아 광산으로 달려가던 때가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나도 저사람 옆에서 함께 싸우고 싶다...'  

 

 

그를 돕고 싶었다.  

내 능력이 어디까지일지, 그 보다 더 잘 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난 정말 그를 돕고 싶었다.  

 

 

그에겐 없는 기갑을 난 소유하고 있었고 함께 전장을 누비는 동안에도 내가 당연히 생존율도 높았기에 그만큼 기여도를 올리는 대도 수월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기여도는 그를 바짝 쫓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 때문인지 작전을 함께 짜고 전투도 함께 참여했던 다른 고레벨 유저들도 현 족장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 그래서 난 벨라토의 새로운 족장으로 선출되었다.  

 

내가 새로운 족장으로 되기는 의외로 쉬웠다.  

원로회라고 하기엔 조금 우습지만, 전쟁과 작전 등을 지휘하는 그룹에 이미 전 족장의 뜻이 전해진 상태고 그러한 뜻이 잘 전해진 상태이기에 나를 중심으로 전투 구조가 다시 짜여졌고 내가 앞장을 서면서 자연히 내 기여도는 전 족장을 뛰어넘게 됐다.  

 

그리하여 내가 새로운 족장이 되었고 그 소식은 빠르게 벨라토 종족 전체로 퍼져나갔다.  

지금까지 전 족장이 워낙 잘 이끌어와서인지 계획적인 족장탈취로 몰아가며 나를 모함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으려 애썼다.  

 

 

내가 족장으로써의 임무에 충실하고 전 족장이 보여줬던 커다란 등을 그들에게 보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난 알게 되었다.  

 

 

족장이란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말로만 들었던 책임감이 얼마만큼의 무게인지...  

난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 그리고 첫 전쟁이 시작되었다.  

 

내가 족장이 되고 첫 크리전쟁이 시작되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의 묘한 긴장감...  

 

 

쏟아지는 응원의 메세지들...  

사냥을 할 때나 전쟁을 할 때 혹은 광산에서 광물을 채집할 때 인사를 하고 알고 지내던 분들의 응원 메세지는 경직된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고 진심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뒤에서 조용히 나를 서포트 해주는 동료들과 힘내라며 이제 일반 유저도 돌아간 전 족장도 나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엄청난 책임감과 그 무게가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결심관 무관하게 신은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6시 인줄 알았던 크리 전쟁이 5시 경에 시작된 것이다.  

 

 

 

▣ 그리고 난 패배했다.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우리... 아니 나는 기갑이 파괴되는 상황까지 맞아가며 싸우고 또 싸웠지만 첫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아코 동맹 구도인 우리 서버에서 벨라토가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한 준비와 리더십이었기에 나에게 돌아올 매서운 화살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쏟아지는 욕설들...  

 

 

내가 친 채팅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날아오는 욕설에 좌절을 넘어선 절망을 느꼈다.  

어느 정도의 욕설은 참아낼 수 있었지만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평소에 친분이 있고 버스를 하면서 알게 된 몇몇 종족원들이 귓말로 날리는 욕설이었다.  

 

 

그들은 이미 내가 친하게 생각했던 이들이 아니었고 자신들이 광산에서 편안히 돈을 벌 수 없음에 무조건적인 불만만을 토로하는 '일반 유저'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게임을 즐기고 친분을 쌓을 친구가 아니라 자신들을 당연히 지켜야만 하는 절대적인 봉사자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나는 자신들과 같이 즐겁게 게임을 즐기길 원하는 하나의 유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나 자신의 무능함에 너무도 화가 났고,  

난 족장의 역할을 할 만큼 대단한 녀석이 아니라는 자학에 힘들어할 때 쯤...  

 

 

 

▣ 난 내 고통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나를 한껏 추켜세우다  

자신들의 이득에 보탬이 안 되자 한순간에 쓰레기로 몰아붙이는 그들이 되었다.  

 

 

그들을 지켜온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 곳에 내가 게임할 시간마저 모두 빼앗겨 가며 내 자신의 자산을 탕진해 기갑을 수리하고 싸워왔던 내 모습이 우습기 시작했다.  

 

 

애초에 무엇을 바라고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일까.  

 

 

내 자신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지만 난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원한 것은 '그의 곁에서 함께 싸우고 싶다.' 이었으니까...  

 

 

 

▣ 그들에 대한 미움이 부질없음을 느꼈을 무렵...  

 

난 이미 게임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사냥도 채굴도 전쟁도... 그 어떤 것도 내게 의미를 주지 못했다.  

해서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부탁을 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또한 그 실수로 인해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성숙' 혹은 '성장'이라고 말하고 그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한 노력이 부족함에 대한 질타와 격려는 받아드릴 수도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내가 당했던 모욕과 온갖 욕설은 부디 다음 족장에게만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처럼 심한 욕설과 비방으로 상처를 입고 게임을 떠나게 만들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게임을 즐겁게 즐겼고 치열한 전투를 즐겼으며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싸운 결과로 족장이 된 것이지 무조건적으로 종족원 모두를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갖는 것도 아니며 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고해서 엄청난 욕설과 비방을 감내해가며 게임을 해야 하는 이유도 없는 이들이다.  

 

 

한 종족간의 단합과 서로가 서로를 밀어주고 당겨주는 따듯한 문화는 우리 스스로 만들 수도 있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욕설과 비방으로 한순간에 같은 종족을 미워하게 될 수도 있고 그러한 족장은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족장의 부재는 그 종족은 자멸로 치닫는 수 도 있다는 것...  

 

 

족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절실하게 알리고 싶다.

나도 단지 즐겁게 게임을 즐기고 싶은 일반 유저라는 사실을 말이다.  

 

 

 

▣ 이는 기자가 플레이하던 서버의 족장이 게임을 떠나며 기자에게 토로한 고백이다.  

 

그는 기자가 플레이포럼의 기자인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며 기자 또한 RF온라인을 사랑하는 한 유저이기에 모 서버에서 비밀 아이디로 즐겁게 게임을 즐기다 만나게 된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용을 기사화하기 까지 엄청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을 안고 자신이 너무도 좋아하던 게임을 떠나게 되는 지경에 이른 그에게 기자 또한 플레이포럼의 기자임을 숨기고 있었기에 혹여 그 사람이 이 기사를 보게 될 경우 또 한 번 실망을 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서 였다.  

 

 

그러면서도 이 기사를 작성하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RF온라인을 그 누구보다 즐겁게 즐겼던 유저가 게임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기에  

그 유저가 다시 RF온라인으로 다시 돌아와 즐겁게 게임을 즐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RF온라인의 시대도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다. 어떤 의미로든 한 종족의 족장이 되었다면 그 족장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그 종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비록 그를 족장으로 선출한 것이 우리들은 아니지만 더욱 잘해달라는 의미로 질책과 격려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만은 기억해야하지 않을까.  

 

 

그 시대에 맞게 우리는 한명의 영웅을 만들어 냈으며 그 영웅은 종족 전체를 생각하며 '나'가 아닌 '우리'의 부흥을 꿈꾸는 이였다. 또, 그 누구보다 열심히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이며 두 종족이 연합을 하고 쳐들어오는 상황에서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전투 참여하여 싸웠던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RF온라인을 너무나 사랑했던 유저일 뿐이라는 것...  

 

 

 

▣ 모 서버별 게시판에 비슷한 상황을 가진 글이 올라왔다. 

 

"이제 저는 조용히 한 구석에 찌그러져 크리쟁과 사냥만 할 테니 제발 욕은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백번 잘못을 시인하는 XXX가..."  

 

 

 

다행이도 그는 게임을 떠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으나...  

그의 마지막 한마디를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은 비단 기자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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